머리카락과 품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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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머리카락을 아주 소중히 여겨왔습니다. 동물의 세계에서도 깃털을 고르고 다듬어 세운 개체가 무리의 대장이 되듯, 사람도 머리를 어떻게 손질했는지가 곧 품위와 지위의 상징이었습니다. 왕실에서는 머리 모양과 장식, 그리고 의복의 형태에 따라 신분이 구분되었으며, 과거에는 머리를 자른다는 것 자체가 큰 죄를 의미했습니다. 실제로 머리를 자르는 것은 죽을죄를 지은 죄인에게나 허용되던 일이었습니다. 우리나라가 2차 세계대전이 오기 전, 외세의 영향으로 머리를 자르게 되었고, 그 기운이 이어져 6.25 전쟁이라는 큰 시련까지 겪게 되었습니다. 원래대로라면 머리를 자르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를 전쟁이었습니다. 머리를 자르게 한 것은 일본이었고, 이는 곧 우리 민족이 인류의 큰 죄를 대신 짊어진 민족이라는 의미로도 해석됩니다. 머리를 손질한다는 것은 삶을 잘 살아가고 있다는 상징입니다. 죽을죄를 지었지만 죽지 않고 살아남은 이들은 삭발을 하고 산에 들어가 수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여성의 경우 삭발하고 산에 들어간다는 것은 매우 무겁고 절실한 결심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상황이 아니고서는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어쩌면 이들은 세상에 대한 욕심이 많아 결국 산속으로 쫓겨났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잘난 생각에 스스로 빠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산속에서 스스로의 욕심을 내려놓게 되면, 머리에 대한 집착 또한 사라지게 됩니다. 그렇게 머리를 기르게 되고, 세상으로 다시 나올 준비가 되는 것입니다. 여성들이 마음이 흔들릴 때, 마음이 갈 바를 잡지 못할 때 종종 머리를 자르거나 만지는 행동을 하게 됩니다. 이는 내면의 변화와 위기의 신호일 수 있습니다. 본질적으로는 자신의 부족함을 인식하고 신분을 낮추는 선택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머리를 자르면 자신의 기운이 떨어질 수도 있고, 자칫 천박해질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기운이 왕성하고 삶의 방향이 뚜렷할 때는 머리를 손질하게 되고, 품위가 드러납니다. 머...

매이지 말고 살아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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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숫자에 연연하거나 의연하지 마십시오. 이제는 어떤 수치나 현상에 의미를 두고 파헤치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우리는 생활을 기쁘고 즐겁게 누리며, 홀연히 떠날 수 있는 자세를 갖추어야 합니다. 어떤 것에도 매이지 마십시오. 세상 모든 일은 오늘도 변하고 내일도 변합니다. 그런데 그 일에 마음이 매이면, 내일이 변해도 나 자신은 그 변화에 함께하지 못합니다. 이제부터는 멋진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 종교나 사상에 얽매이지 말고, 오로지 '어떤 인생을 살 것인가'에 대한 자신의 이념을 찾아야 합니다. 그 이념이 정립되면 어디에도 얽매일 필요가 없습니다. 신에게도 매이지 마십시오. 그것이 곧 자연입니다. 신도 자연이며, 우리 자신도 자연입니다. 세상의 모든 현상은 자연의 흐름 속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삼세판 따지며 과거·현재·미래를 얽매이는 것들은 우리가 알아가기 위해 공부하는 수단일 뿐입니다. 앞으로는 스승께서 공부할 내용을 이끌어 주실 것이니, 우리는 그것을 알아가며 즐겁게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식을 얻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그 지식을 삶에 활용하여 빛나는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 이 세상에 온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안다는 것은 그저 아는 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우리 인생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를 살피고, 방편으로 잘 활용하여 삶을 빛나게 하는 데 필요합니다. 부처에게도 매이지 마십시오. 아는 것은 가르치는 사람이 잘 가르치면 스스로 알아지게 됩니다. 무엇인가에 매이면 그다음 것이 보이지 않습니다. 자신이 아는 만큼 행하고, 실천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좋은 멘토를 만나게 되면 오늘 아는 것이 내일 아는 것에 더해져, 점점 더 질량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제는 종교 비교학, 사상 비교학, 그리고 자기 이론의 비교학 등을 연구해 보아야 할 때입니다. 과거에는 신에게 매달려 살았다면, 앞으로는 새로운 법이 나오고 있으니 이것들과도 비교해보며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퇴보하려는 것이...

진정한 봉사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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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먼저 '복지'라는 개념부터 바르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앞으로 인류가 나아가야 할 길은 곧 복지사회이며, 미래는 복지사업의 시대입니다. 복지사업을 펼치는 사람들이 나타나면 경제는 자연스럽게 그들에게 흘러가고, 그들이 인류를 이끌어가는 경영자가 됩니다. 지식인들이 이러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잘 정리하여 책으로 펴낸다면, 그동안 사회가 찾지 못했던 해답을 보여주는 내용으로 인해 짧은 시간 안에 널리 퍼지게 됩니다. 그 책은 지적 재산권이 되고, 그 사람의 작품은 인류를 위한 귀한 자료로 쓰이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홍익인간이 해야 할 일이며, 진정한 복지사업입니다. 이러한 콘텐츠는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게 되고, 처음부터 돈을 벌기 위한 목적이 아니었더라도 결과적으로 큰 경제가 따르게 됩니다. 우리 사회는 그동안 남의 저작권을 소홀히 여기는 경우가 많았기에 이러한 구조를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인류는 책값을 내고 정당하게 구매하여 그 책을 낸 사람에게 정당한 보상을 하며, 그 경제가 다시 저작자에게 돌아가게 됩니다. 우리가 스스로 개발한 콘텐츠가 인류에게 꼭 필요한 것이라면, 우리뿐 아니라 전 세계가 그 가치를 알아보고 찾게 됩니다. 이처럼 새로운 원작 콘텐츠를 바탕으로 교육용 자료를 비롯해 다양한 활용물이 만들어지면 또 하나의 경제 흐름이 생겨나고, 그 수익은 다시 지적 재산권자에게 돌아갑니다. 그 결과 더 좋은 콘텐츠를 만들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고, 이는 인류를 위한 순환 구조가 됩니다. 우리나라는 사람을 키우는 나라입니다. 자원이나 부존물이 많지 않지만, 사람만큼은 세계에 내놓을 수 있습니다. 이제 제대로 갖춰진 사람들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게 되면, 엄청난 경제적 효과가 따르게 됩니다. 그리고 그 경제는 다시 인류를 위한 연구와 개발로 이어져 더 좋은 콘텐츠가 탄생하게 됩니다. 이런 선순환 구조를 만드는 것이 진정으로 인류에 이로운 삶을 살아가는 길이며, 우리가 지금껏 인류의 다양한 문물을 받아들이고...

돈의 본질과 후천시대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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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돈에 대해 맹목적으로 갈망하고 좇기만 한다면, 돈은 결코 우리에게 오지 않습니다. 돈이란 뒤쫓는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돈을 자신의 생명처럼 귀하게 여기고 깊이 아끼며 사랑할 때, 비로소 돈은 우리 곁으로 다가옵니다. 이는 단순히 돈을 가지고 싶다는 마음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돈을 진정으로 아끼고 사랑하기 위해서는 먼저 돈이란 무엇인지 깊이 공부하고 그 본질을 알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후천시대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지난 선천 시대의 낡은 방식과 생각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이 새로운 시대에는 돈의 본질을 아는 사람만이 비로소 돈을 바르게 쓰고, 만지고, 또 얻을 수 있는 자격을 갖추게 됩니다.    과거 선천 시대에는 돈의 의미를 깊이 몰라도 간절히 원하면 돈을 얻을 수 있었고, 지식을 원하면 지식을, 재주를 원하면 재주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자연은 지식을 갖춘 이에게 돈까지 함께 주어 세상을 움직이게 하는 것을 경계했기에, 이 둘을 한꺼번에 주지 않고 귀한 인연을 통해서만 허락했습니다. 그렇기에 지식인이 직접 돈을 벌려고 애쓰는 것은 자연의 섭리에 어긋나는 욕심으로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후천시대에는 다릅니다. '이 돈으로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가?' 하는 분명한 명분을 세울 때, 자연은 그에 필요한 만큼의 돈을 허락합니다. 자신이 무엇을 위해 살고자 하는지에 대한 숭고한 이념 없이, 막연히 '돈 벌어서 좋은 일 하고 싶다'고 말하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진정으로 좋은 일이 무엇인지부터 깊이 공부하고 성찰해야 합니다.    앞으로 우리 사회는 개인에게 직접 돈을 소유하게 하는 방식이 아니라, 돈을 바르게 '쓸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운영될 것입니다. 우리 각자에게는 이러한 권리가 주어지며, 마치 카드를 사용하듯 그 목적에 맞게 쓰지 않으면 일정한 제약이 따를 것입니다...

착하게 사는 것과 바르게 사는 것의 차이, 그리고 진짜 수행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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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종종 상대가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음에도 먼저 나서서 도와주고, 그에 대한 고마움도 듣지 못한 채 오히려 멀어지는 모습을 보고 서운해합니다. 그러나 상대가 도움을 청하기 전에는, 그 사람을 돕는 것이 오히려 간섭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삶의 습관이 쌓이면서 우리 삶을 어렵게 만들고 있지만, 우리는 그 점을 제대로 점검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처럼 스스로의 행동과 마음을 하나씩 알아가는 것을 ‘깨달음’이라 합니다. 자신의 의도가 아무리 선하더라도, 결과적으로 상대에게 불편함을 주었다면 그것을 인식하고 고치려는 노력이 바로 ‘수행’입니다. 깨달은 후에 수행을 통해 바르게 살아가는 것이 정법입니다. 반대로, 깨달음을 얻기 위해 억지로 수행하는 것은 영적인 집착이나 욕심일 수 있습니다.    ‘공부’란 바로 깨닫기 이전에 하는 것으로, 배움을 통해 자신의 모순을 찾아내는 과정입니다. 내가 사회 속에서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 인생을 살아가며 어떤 잘못된 습관과 태도를 가지고 있는지를 발견하고, 스스로의 부족함을 채우는 것이 공부입니다. 자신이 삶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 그 원인을 찾고자 하는 마음에서 공부는 시작됩니다.    열심히 살았지만 왜 이렇게 힘든가? 혹시 나는 잘못된 방향으로 열심히 살아온 것은 아닌가? 나는 제대로 하고 있다고 믿었지만, 사실은 잘못된 행동을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이런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찾아가는 과정이 바로 공부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흔히 ‘착하게’ 살아야 한다고 배워왔지만, 실제로는 ‘바르게’ 살아야 합니다. 착하게 사는 것은 때로는 세상 이치를 잘 모르는 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너무 착하게만 살면 오히려 주변에 나를 이용하는 사람들을 만들어내는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바르게 산다는 것은 세상과 사물에 대해 냉철한 분별력을 가지고, 바른 길을 선택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

진정한 덕행이란 무엇인가: 질량에 따라 달라지는 실천의 본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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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행 실천이란, 자신이 남에게 득이 되도록 행하는 것을 삶 속에서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덕행을 실천해야만, 자신이 지어온 업이 소멸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시기에는, 덕행을 실천하려 해도 뜻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의 질량에 걸맞지 않은 덕행은 참된 덕행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자신이 만약 무식한 사람이라면, 누군가 돌을 옮기려 할 때 함께 들어주는 행위만으로도 덕행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지식인이라면, 같은 행위를 한다고 해도 그것은 덕행이 되지 않습니다. 이 두 경우는, 그 질량 자체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무식한 사람이 돈을 벌어 어려운 이웃에게 쌀을 나누어 준다면, 그것은 충분히 덕행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식인이 같은 행위를 한다면, 쌀의 양과 상관없이 참된 덕행이 되지 않습니다. 지식인의 덕행은 그 성격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지식인은 물질로 덕행을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지적 능력과 질량을 바탕으로 사람들을 가르치고 이끌어주는 덕행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무식하던 시절에는, 일반적인 지식을 가르치는 것조차 덕행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질량 있는 지식인들이 많아졌기에, 단순한 지식을 나누는 것으로는 더 이상 덕행이 되지 않습니다. 앞으로는 이러한 지식인들이 ‘멘토’가 되어야 하는 시대입니다. 멘토는, 바른 삶을 이끌어주는 덕행을 실천해야 합니다. 이처럼 사람마다 질량이 다르므로, 그에 걸맞은 덕행도 달라져야 합니다.    기업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직급이 있고, 그 직급에 맞는 질량의 일을 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부장이 과장의 업무를 아무리 많이 해도, 부장으로서의 본연의 역할을 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의미의 ‘일’은 하지 않은 셈이 됩니다. 작은 일이라도 자신의 위치와 질량에 맞는 역할을 해야, 회사에서는 그 사람을 일한 사람으로 인정하게 됩니다. 이제는 ...

사주와 인연의 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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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사주를 보고 궁합을 본다고 할 때, 삼합이 맞는다고 하는 이유는 우리가 동물의 근성을 지닌 육신을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12지지가 존재하며, 이는 인간의 육신이 동물의 속성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우리나라는 사계절이 뚜렷하고, 사주 또한 매우 뚜렷하게 나타나는 민족이기에 사주 명리학이 잘 맞아떨어지는 환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동물의 육신을 쓰고 이 세상에 온 만큼, 12지지 중 삼합 관계가 잘 맞는 경우가 많은데, 이 삼합이란 먹이사슬처럼 얽혀 있거나 다투는 관계인 상충이 아닌, 서로를 편안히 바라보는 관계입니다. 마치 소 닭 보듯 아무 일 없이 조화롭게 지내는 것이 바로 삼합의 조화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빚의 고리'로 인해 인연법을 따르게 됩니다. 전생에서 맺은 인연의 빚으로 인해 현생의 인연이 결정되며, 우리가 처음 지상에 올 때도 바로 이 빚의 고리를 통해 인연이 정해지는 것입니다. 이 인연법 가운데 가장 큰 빚을 지고 있는 관계는 바로 부모와 자식 사이입니다. 가장 많은 빚을 진 존재가 부모이기 때문에, 부모와 자식은 가까운 인연으로 만나게 되고, 서로를 위해 살아야 그 빚이 갚아지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부모와 자식은 원수 중의 원수일 수도 있습니다. 가까운 인연일수록 전생에서 맺은 인연의 무게가 크기 때문에 원수지간으로 만나는 것이며, 그러한 관계가 오히려 잘 만난 인연입니다. 자식, 형제, 가족이야말로 서로에게 가장 큰 빚을 진 관계입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빚을 받기 위해 인연법에 따라 이 세상에 온 것입니다.    부부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가장 가까운 인연이 되어 하나의 씨앗을 만드는 관계가 됩니다. 부부가 서로 잘 살아간다는 것은, 상대방이 부족한 부분을 자신이 채워주고 감싸며 그 빚을 갚아가는 과정이라는 원리를 알고, 서로에게 상생함으로써 빚을 갚아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