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덕행이란 무엇인가: 질량에 따라 달라지는 실천의 본질
덕행 실천이란, 자신이 남에게 득이 되도록 행하는 것을 삶 속에서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덕행을 실천해야만, 자신이 지어온 업이 소멸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시기에는, 덕행을 실천하려 해도 뜻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의 질량에 걸맞지 않은 덕행은 참된 덕행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자신이 만약 무식한 사람이라면, 누군가 돌을 옮기려 할 때 함께 들어주는 행위만으로도 덕행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지식인이라면, 같은 행위를 한다고 해도 그것은 덕행이 되지 않습니다. 이 두 경우는, 그 질량 자체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무식한 사람이 돈을 벌어 어려운 이웃에게 쌀을 나누어 준다면, 그것은 충분히 덕행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식인이 같은 행위를 한다면, 쌀의 양과 상관없이 참된 덕행이 되지 않습니다. 지식인의 덕행은 그 성격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지식인은 물질로 덕행을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지적 능력과 질량을 바탕으로 사람들을 가르치고 이끌어주는 덕행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무식하던 시절에는, 일반적인 지식을 가르치는 것조차 덕행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질량 있는 지식인들이 많아졌기에, 단순한 지식을 나누는 것으로는 더 이상 덕행이 되지 않습니다. 앞으로는 이러한 지식인들이 ‘멘토’가 되어야 하는 시대입니다. 멘토는, 바른 삶을 이끌어주는 덕행을 실천해야 합니다. 이처럼 사람마다 질량이 다르므로, 그에 걸맞은 덕행도 달라져야 합니다.
기업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직급이 있고, 그 직급에 맞는 질량의 일을 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부장이 과장의 업무를 아무리 많이 해도, 부장으로서의 본연의 역할을 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의미의 ‘일’은 하지 않은 셈이 됩니다. 작은 일이라도 자신의 위치와 질량에 맞는 역할을 해야, 회사에서는 그 사람을 일한 사람으로 인정하게 됩니다. 이제는 우리 각자가 자신의 질량에 맞는 덕행을 실천해야 할 때입니다.
오늘날 우리 국민들이 하고 있는 많은 봉사 활동들은, 아직 참된 덕행이라 말하기 어렵습니다. 지금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대부분의 행위는, 자신을 갖추기 위한 공부와 연구, 그리고 임상실험 과정일 뿐입니다. 즉, 진정한 덕행의 단계에 이르기 위한 준비 작업입니다.
진정한 홍익인간들은 대승의 부처들로서, 단순한 이타행이 아닌 ‘이광 공익(利廣 公益)’을 실천하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특정한 대상을 도와서 그들로부터 고맙다는 인사를 받는다면, 그것은 주고받은 것이 되어 덕행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광 공익을 실천하면, 그 누구도 개인적으로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작게는 사회에, 크게는 인류에 이바지하는 이러한 실천은, 사람들에게는 대단해 보일 수 있으나, 특정인에게 감사 인사를 받는 일이 없습니다. 진정한 홍익인간은 바로 이러한 질량의 일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삶을 불살라 사람을 널리 이롭게 하는 것, 이것이 ‘홍익 덕행’입니다. 질량이 큰 한 사람을 키우기 위해서는, 실로 많은 이들의 희생이 뒤따릅니다. 그 사람이 질량 있는 존재로 깨어나기 위해서, 주변에서 수많은 이들이 묵묵히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질량 있는 한 사람이 깨어나면, 그 존재는 마치 초신성과도 같습니다.
(초신성이란 일반적인 별보다 1만 배 이상의 빛을 내는 별로, 질량이 큰 별이 진화하는 마지막 단계에서 엄청난 폭발을 통해 밝아졌다가 점차 사라집니다. 이 폭발 후에는, 다시 모여 주위 환경에 영향을 받지 않고 스스로 존재하는 영롱한 에너지 질량체가 됩니다.)
사실 우리는 대자연, 즉 빅뱅 이전의 세계에서 자신이 별이라는 사실조차 모르고 살아갑니다. 우리의 질량은 현재의 과학으로는 아직 측정이 불가능하며, 우리가 하는 말의 질량조차 과학적 측정이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대자연 안에서는, 인간의 말보다 더 큰 에너지 질량은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지금, 그 질량을 느끼지도, 측정하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언젠가는 이것 또한 과학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날이 올 것입니다. 지식의 질량을 우리가 지금 측정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경험적으로 지식에 질량이 있다고 느끼지만, 이를 과학적으로 증명하거나 수치화할 정도로는 아직 과학이 발달하지 못했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삶이 힘들고 고단하면, 세상을 바르게 분별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좋은 지식과 에너지를 주어도, 자신의 삶이 어려움에서 벗어나야 마음이 넉넉해지고, 세상을 넓고 멀리 보는 지혜가 생깁니다.
기업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직급이 있고, 그 직급에 맞는 질량의 일을 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부장이 과장의 업무를 아무리 많이 해도, 부장으로서의 본연의 역할을 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의미의 ‘일’은 하지 않은 셈이 됩니다. 작은 일이라도 자신의 위치와 질량에 맞는 역할을 해야, 회사에서는 그 사람을 일한 사람으로 인정하게 됩니다. 이제는 우리 각자가 자신의 질량에 맞는 덕행을 실천해야 할 때입니다.
오늘날 우리 국민들이 하고 있는 많은 봉사 활동들은, 아직 참된 덕행이라 말하기 어렵습니다. 지금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대부분의 행위는, 자신을 갖추기 위한 공부와 연구, 그리고 임상실험 과정일 뿐입니다. 즉, 진정한 덕행의 단계에 이르기 위한 준비 작업입니다.
진정한 홍익인간들은 대승의 부처들로서, 단순한 이타행이 아닌 ‘이광 공익(利廣 公益)’을 실천하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특정한 대상을 도와서 그들로부터 고맙다는 인사를 받는다면, 그것은 주고받은 것이 되어 덕행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광 공익을 실천하면, 그 누구도 개인적으로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작게는 사회에, 크게는 인류에 이바지하는 이러한 실천은, 사람들에게는 대단해 보일 수 있으나, 특정인에게 감사 인사를 받는 일이 없습니다. 진정한 홍익인간은 바로 이러한 질량의 일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삶을 불살라 사람을 널리 이롭게 하는 것, 이것이 ‘홍익 덕행’입니다. 질량이 큰 한 사람을 키우기 위해서는, 실로 많은 이들의 희생이 뒤따릅니다. 그 사람이 질량 있는 존재로 깨어나기 위해서, 주변에서 수많은 이들이 묵묵히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질량 있는 한 사람이 깨어나면, 그 존재는 마치 초신성과도 같습니다.
(초신성이란 일반적인 별보다 1만 배 이상의 빛을 내는 별로, 질량이 큰 별이 진화하는 마지막 단계에서 엄청난 폭발을 통해 밝아졌다가 점차 사라집니다. 이 폭발 후에는, 다시 모여 주위 환경에 영향을 받지 않고 스스로 존재하는 영롱한 에너지 질량체가 됩니다.)
사실 우리는 대자연, 즉 빅뱅 이전의 세계에서 자신이 별이라는 사실조차 모르고 살아갑니다. 우리의 질량은 현재의 과학으로는 아직 측정이 불가능하며, 우리가 하는 말의 질량조차 과학적 측정이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대자연 안에서는, 인간의 말보다 더 큰 에너지 질량은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지금, 그 질량을 느끼지도, 측정하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언젠가는 이것 또한 과학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날이 올 것입니다. 지식의 질량을 우리가 지금 측정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경험적으로 지식에 질량이 있다고 느끼지만, 이를 과학적으로 증명하거나 수치화할 정도로는 아직 과학이 발달하지 못했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삶이 힘들고 고단하면, 세상을 바르게 분별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좋은 지식과 에너지를 주어도, 자신의 삶이 어려움에서 벗어나야 마음이 넉넉해지고, 세상을 넓고 멀리 보는 지혜가 생깁니다.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