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를 통해 배우는 진짜 공부, 아픔이 주는 깨달음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며 겪는 다양한 경험들 중에는, 아픈 사람이나 어려운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의 배움의 과정일 수 있습니다. 몸이 아픈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왜 아파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도록 우리를 이끌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아픈 이를 손으로 만져서 낫게 해주는 재주를 타고납니다. 그러나 그 재주가 단순히 병을 고치는 데에만 쓰이도록 주어진 것은 아닙니다. 자신이 그런 힘을 가지고 있다면, 아픈 사람들이 인연으로 찾아오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 인연은 단순히 남을 도우라는 의미만이 아니라, 그 안에서 자신이 반드시 공부해야 할 무언가가 있기 때문에 오는 것입니다.
기 수련을 통해서든, 약초를 공부해서든, 혹은 부적을 통해서든 자신이 아픈 사람을 낫게 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태어난 사람은 결국 "왜 이 사람이 아파야 했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공부를 하도록 이끌립니다. 이것이 바로 자연의 이치이고, 우주의 법칙입니다.
식물을 만지고 자연을 느끼는 것도 결국 지구와 신(神)의 뜻을 배우는 과정입니다. 이 모든 환경은 우리로 하여금 그 법칙을 공부하도록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공부가 제대로 이루어지면, 인생의 한 정리 시점인 40대에 접어들며 자연스럽게 삶이 정돈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정작 공부가 되지 않으면 삶의 흐름도 정리되지 못한 채 방황하게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자신이 가진 재주로 환자를 낫게 해주는 것과 자신이 공부를 해나가는 것은 별개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기 수련을 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바로 공부가 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재주를 익히는 과정일 뿐입니다. 한의학을 배우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기술이나 지식을 갖추어 놓으면, 인연으로 아픈 사람들이 찾아오게 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들이 왜 아프게 되었는지를 깊이 있게 알아내는 것이 진짜 공부라는 사실입니다.
기술이나 재주를 갖추는 것은 환경을 준비하는 단계입니다. 그 이후에 그 환경 속에서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를 깨닫는 것이야말로 참된 공부입니다. 지금 많은 이들이 어떤 공부를 해야 하는지를 제대로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공부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이론을 배우는 공부이고, 다른 하나는 실전 속에서 왜 그런 일이 생기는지를 파악하는 공부입니다. 학교에서는 이론적인 기초를 배우는 것이고, 실전에 뛰어들어 사람을 만나고 사회를 겪으며 하는 공부가 진짜 공부입니다.
이러한 실전의 환경을 받은 사람은 사실 축복받은 사람입니다. 그에게 인연으로 오는 환자들은, 자신을 공부시키기 위한 소중한 교재와도 같은 존재입니다. 이들은 지금 자신을 위해 희생하고 있으며, 그 속에서 자신은 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이러한 환자들을 ‘을’로 대하고, 자신을 ‘갑’으로 착각합니다. 그렇게 몇 년간 환자를 낫게 해주는 일만 반복하다 보면, 결국 본인도 병을 얻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아픔의 이유를 공부하지 않고 겉만 보고 고쳐주려 했기 때문입니다. 환자가 왜 아픈지를 공부했다면, 그는 같은 아픔을 반복하지 않았을 것이고, 나 또한 병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공부하지 않고 환자를 대하면 결국 자기 자신도 아픔을 통해 공부하게 되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때로는 자신이 직접 아프게 되기도 하고, 치료를 받으러 다니며 스스로를 공부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그런 상황에서 치료자조차도 단지 병만 고치려 한다면, 자연은 그런 시도를 방해하거나, 그 관계를 끝내기도 합니다.
자연은 그렇게까지 하면서도 단 한 사람의 제자를 만들고자 수많은 사람들을 희생시키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처럼 많은 이들의 희생을 통해 한 명의 바른 사람을 만들어내는 것, 그것이 바로 신의 일이고, 홍익인간의 길입니다.
수많은 희생이 있었더라도 그 한 사람이 바르게 성장하여 지혜를 열고 세상의 근본을 밝힌다면, 인류 전체를 구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모두 그 희생을 먹고 자라난 존재들이며,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제자입니다.
한 사람의 큰 그릇을 만들기 위해 많은 백성들이 희생되어가며, 그 사람이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만약 그 사람이 이러한 사실을 빨리 깨닫지 못하면, 더 많은 사람이 희생을 겪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연은 어떻게든 그 일을 이뤄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잘났다고 자부하며 공부를 하지 않는다면, 자연은 결국 그 사람을 아프게 만들어 다른 제자의 교재로라도 쓰게 됩니다. 자신이 겪는 어려움은 지금 자신이 바른 길을 걷고 있지 않다는 신호입니다. 그러니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를 진지하게 되돌아봐야 합니다.
단지 아픈 사람을 치료해주고 돈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 반대편에는 돈을 내고 고통을 겪는 상대가 있습니다. 우리는 왜 이런 구조 속에 살아가야 할까요?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는 각자 자신의 역할이 있기 때문이며, 큰 재주를 받은 사람은 반드시 큰일을 해내야 하는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원리를 깨우치게 되면, 개별 환자를 낫게 해주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아픈 사람이 없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원리를 정리하고, 사람들 스스로가 바르게 살아가도록 길을 열어주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자연의 일꾼입니다.
자신이 직접 환자를 상대하고 있다는 것은 아직도 공부 중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모두는 아픈 사람들,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과 함께 도반이 되어, 함께 연구하고 배우며 이 세상을 밝게 만들어가야 할 존재들입니다.
기 수련을 통해서든, 약초를 공부해서든, 혹은 부적을 통해서든 자신이 아픈 사람을 낫게 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태어난 사람은 결국 "왜 이 사람이 아파야 했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공부를 하도록 이끌립니다. 이것이 바로 자연의 이치이고, 우주의 법칙입니다.
식물을 만지고 자연을 느끼는 것도 결국 지구와 신(神)의 뜻을 배우는 과정입니다. 이 모든 환경은 우리로 하여금 그 법칙을 공부하도록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공부가 제대로 이루어지면, 인생의 한 정리 시점인 40대에 접어들며 자연스럽게 삶이 정돈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정작 공부가 되지 않으면 삶의 흐름도 정리되지 못한 채 방황하게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자신이 가진 재주로 환자를 낫게 해주는 것과 자신이 공부를 해나가는 것은 별개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기 수련을 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바로 공부가 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재주를 익히는 과정일 뿐입니다. 한의학을 배우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기술이나 지식을 갖추어 놓으면, 인연으로 아픈 사람들이 찾아오게 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들이 왜 아프게 되었는지를 깊이 있게 알아내는 것이 진짜 공부라는 사실입니다.
기술이나 재주를 갖추는 것은 환경을 준비하는 단계입니다. 그 이후에 그 환경 속에서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를 깨닫는 것이야말로 참된 공부입니다. 지금 많은 이들이 어떤 공부를 해야 하는지를 제대로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공부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이론을 배우는 공부이고, 다른 하나는 실전 속에서 왜 그런 일이 생기는지를 파악하는 공부입니다. 학교에서는 이론적인 기초를 배우는 것이고, 실전에 뛰어들어 사람을 만나고 사회를 겪으며 하는 공부가 진짜 공부입니다.
이러한 실전의 환경을 받은 사람은 사실 축복받은 사람입니다. 그에게 인연으로 오는 환자들은, 자신을 공부시키기 위한 소중한 교재와도 같은 존재입니다. 이들은 지금 자신을 위해 희생하고 있으며, 그 속에서 자신은 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이러한 환자들을 ‘을’로 대하고, 자신을 ‘갑’으로 착각합니다. 그렇게 몇 년간 환자를 낫게 해주는 일만 반복하다 보면, 결국 본인도 병을 얻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아픔의 이유를 공부하지 않고 겉만 보고 고쳐주려 했기 때문입니다. 환자가 왜 아픈지를 공부했다면, 그는 같은 아픔을 반복하지 않았을 것이고, 나 또한 병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공부하지 않고 환자를 대하면 결국 자기 자신도 아픔을 통해 공부하게 되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때로는 자신이 직접 아프게 되기도 하고, 치료를 받으러 다니며 스스로를 공부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그런 상황에서 치료자조차도 단지 병만 고치려 한다면, 자연은 그런 시도를 방해하거나, 그 관계를 끝내기도 합니다.
자연은 그렇게까지 하면서도 단 한 사람의 제자를 만들고자 수많은 사람들을 희생시키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처럼 많은 이들의 희생을 통해 한 명의 바른 사람을 만들어내는 것, 그것이 바로 신의 일이고, 홍익인간의 길입니다.
수많은 희생이 있었더라도 그 한 사람이 바르게 성장하여 지혜를 열고 세상의 근본을 밝힌다면, 인류 전체를 구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모두 그 희생을 먹고 자라난 존재들이며,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제자입니다.
한 사람의 큰 그릇을 만들기 위해 많은 백성들이 희생되어가며, 그 사람이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만약 그 사람이 이러한 사실을 빨리 깨닫지 못하면, 더 많은 사람이 희생을 겪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연은 어떻게든 그 일을 이뤄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잘났다고 자부하며 공부를 하지 않는다면, 자연은 결국 그 사람을 아프게 만들어 다른 제자의 교재로라도 쓰게 됩니다. 자신이 겪는 어려움은 지금 자신이 바른 길을 걷고 있지 않다는 신호입니다. 그러니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를 진지하게 되돌아봐야 합니다.
단지 아픈 사람을 치료해주고 돈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 반대편에는 돈을 내고 고통을 겪는 상대가 있습니다. 우리는 왜 이런 구조 속에 살아가야 할까요?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는 각자 자신의 역할이 있기 때문이며, 큰 재주를 받은 사람은 반드시 큰일을 해내야 하는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원리를 깨우치게 되면, 개별 환자를 낫게 해주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아픈 사람이 없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원리를 정리하고, 사람들 스스로가 바르게 살아가도록 길을 열어주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자연의 일꾼입니다.
자신이 직접 환자를 상대하고 있다는 것은 아직도 공부 중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모두는 아픈 사람들,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과 함께 도반이 되어, 함께 연구하고 배우며 이 세상을 밝게 만들어가야 할 존재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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